어느 화창한 봄날, 화가 스텐버그는 듀셀돌프시 교외의 숲 속을 거닐고 있었다. 그 때 한 사람의 집시족 소녀가 옆구리에 바구니를 끼고 지나갔다. 스텐버그는 집시들 가운데서도 뛰어나게 용모가 아리따운 이 소녀에게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끌렸다. 그래서 자기가 창작 중에 있는 「스페인의 무녀(舞女)」란 그림의 모델로 정할 것을 결심하고 교섭한 결과, 일 주일에 3회씩 자기의 아뜨리에로 불러들이게 되었다. 아뜨리에에 온 소녀 페피타는 눈을 휘둥거리며 화실에 진열된 많은 그림들을 보고 놀라와 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고 있는 한 폭의 큰 그림에 이르러서는 더욱 놀라움을 금치 못하여 스텐버그에게 물었다. "이 사람이 누구예요?" "그리스도야" 스텐버그는 무심고 대답했다. "그리스도를 지금 어떻게 하고 있는 거예요?" "십자가에 못 박는거야." "옆에 둘러선 저 악한 같이 뵈는 사람들은 누구예요?" "페피타. 지금 바빠 얘기할 수 없어. 넌 그저 내가 말한대로 그렇게 서 있기만 해라." 소녀는 그 이상 아무 것도 묻지 않았으나 그 그림을 줄곧 응시하고 있었다. 아뜨리에에 올 때마다 유독 그 그림만이 소녀의 눈에 뜨이는 것 같았다. 하루는 참다 못한 듯 다시 한번 묻는 것이다. "왜 십자가에 못 박고 있어요? 아주 나쁜 사람인가 보죠?" "아냐. 아주 착한 사람이야." 너무나 소녀가 알고싶어 했으므로, "꼭 한 번만 얘기해 줄테니 잘 들어두어. 그리고 다음부턴 아무 것도 묻지마." 스텐버그는 이렇게 말하고 십자가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너무 오랜 얘기여서 이 화가에겐 아무 흥미조차 없는 것이었으나, 소녀에게는 너무나 새롭고 또 신기한 사실이었다. 스탠버그는 그냥 붓을 놀리기 시자했다. 그러나 소녀는 생각할수록 마음이 괴로와져 눈에는 어느덧 구슬같은 눈물 방울이 아롱져 있었다. 마지막 날 페피타는 그 십사가의 그림을 쳐다보며 작별을 못내 아쉬워 했다. "수고해줘서 고마워. 자, 이건 네게 주는 사례금이야."하고 화가는 은전 몇닢을 꺼내어 소녀에게 쥐어주었다. "아저씨 감사합니다." 소녀는 납죽히 고개를 숙였다. 그러더니 대뜸, "그런데 아저씨, 그리스도라는 분이 아저씨 때문에 저런 고생을 하셨는데 아저씬 그럼 그 분을 퍽도 사랑하시겠네요."했다. 화가는 잠자코 말이 없었다. 이에 페피타는 슬픔을 억누르지 못하며 자리를 떴다.
그러나 소녀의 말은 무딘 화가의 마음을 깊숙히 찔러놓고야 말았다. '아저씨 때문에 저런 고생을 하셨는데' 이 말이 그의 귓전을 맴돌고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그 자신이 슬픔을 가눌 수 없이 되고 말았다. 그는 일찌기 그리스도를 사랑해 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카톨릭 교회는 그에게 위로를 주지 못했고 괴로움을 덜어주지 못했다. 사교도 신부도 하나님의 평안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화가는 그 후에 은밀한 곳에서 성경을 읽으며 죄사함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의 어느 집회에 참석했다. 거기서 그는 처음으로 참다운 신자들과 접촉하기 시작했고 처음으로 간단 명료한 복음을 듣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자기의 죄를 지고 가신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은 그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비밀을 알게 하셨다. 그래서 이제는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심혼으로부터의 절규를 그도 부르짖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어떻게 하면 이 놀라운 그리스도의 사랑을 남들에게 알릴 수 있을 것인가, 이제는 그것이 문제였다." "그렇다! 그림으로 하자. 나의 화필로써 능히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내 보일 수가 있을 것이다. 그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제까지는 다해 보지 못한 최선의 정력을 다해 한 폭의 그림을 그려 듀셀돌프시 화랑에 전시하고 그 밑에 『내 너를 위하여 이 모든 일을 당하였노라. 너 나를 위하여 무엇 하느냐』라는 제목을 달았다. 이 그림과 이 글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영혼들이 그리스도께 인도되었는지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리라. 어느 날 화가는 한 초라한 집시 소녀가 그 그림 앞에서 울고 있는 것을 보았다. 페피타였다. "선생님, 예수님이 나까지도 저렇게 사랑해 주신 걸까요?…"소녀는 부르짖었다. 예수님은 돈 많은 사람이나 이름있는 이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가난하고 외로운 집시 소녀를 위해서도 죽으신 사실을 화가는 설명했다.
이번에는 화가 자신이 자청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을 얘기할 수 있음은 그 자신이 직접 체험했기 때문이었다. 소녀는 즉시 믿고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읍(感泣)하면서 돌아 갔다. 하나님은 페피타를 통하여 화가를 구원하시고 다시 화가를 통하여 페피타를 구하신 것이다. 수개월이 지난 어느날 밤, 스텐버그에게 낯 모르는 사람이 찾아왔다.사람이 다 죽어가니 좀 와 달라는 것이다. 그 사람을 따라 시골길을 더듬어 울창한 숲 속으로 들어 가니 거기는 빈한한 천막이 서넛 세워져 있었다. 그 중의 한 천막 속에 누워 이 화가를 부른 주인공은 바로 소녀 페피타였다. 소녀는 아무 유한도, 슬픔도, 두려움도 없었다. 오직 사랑하시는 구주께서 자기의 모든 죄를 지시고 영원히 살 길을 주셔서 이제는 영원히 함께 사시려고 자기를 불러 가시는데 대한 감사와 기쁨과 평안 뿐이었다. 화가는 여기서 이와 같이 소녀의 임종을 지켜 본 것이다. 그 뒤 이 화가도 주의 곁으로 갔으나, 그 그림만은 그 화랑에 언제나 걸려 있었다.
하루는 고상한 차림새를 한 한 사람의 귀인이 이 화랑을 찾아와 스텐버그의 그림과 그 아래 쓰여진 글귀를 유심히 음미하고 있었다. 하나님은 그의 마음을 두드리셨다. 그는 그 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그리스도인이 되어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께 인도하는 한 위대한 전도 운동의 선구자가 되었으니, 이 이가 바로 저 유명한 모라비안 교도 선교 운동의 진젠도르프(Zinzendorf) 백작(伯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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