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 분실물 센터에 가면 여러 가지 주인이 찾아가지 않은 물건이 쌓여 있다고 합니다. 티셔쓰로부터 시작해서 값나가는 모피코트 또 값비싼 귀금속에 이르기까지 많은 물건들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찾아가는 물품들도 있지만 찾아가지 않는 물품들이 더 많다고 합니다. 왜 찾아가지 않을까? 귀찮아서 찾아가지 않는 사람도 있고 또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모르기에 찾는 방법을 몰라서 찾지 못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찾기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잃어버린 자식입니다. 자식을 잃어버리고 그 자식 찾기를 포기하는 부모는 아마 세상천지에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세 가지 비유 세 가지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먼저는 잃은 양의 이야기입니다. 어떤 목자가 양을 치는데 저녁이 되어서 양들을 우리에 집어넣다가 봅니다. 그런데 한 마리 한 마리 세다가 보니까 한 마리가 빕니다. 아흔 아홉 마리 밖에 안 됩니다. 목자는 그 한 마리 잃어버린 한 마리를 찾기 위해서 아흔 아홉 마리를 우리에 두고 그 양을 온 산을 뒤지며 찾아다닌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이게 잃은 양의 비유입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잃은 은전의 비유, 드라크마의 비유라고 합니다. 어떤 여인이 사랑하는 남편으로부터 선물받은 열 드라크마가 있습니다. 은전인데 이것은 한 사람의 노동자 임금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선물 받아서 고리에 꿰어서 머리에 메고 남편을 사랑한다는 증거로 늘 몸에 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중에 한 드라크마를 잃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여인은 불을 켜고 온 집안을 뒤지면서 그 은전하나를 찾는다는 것입니다. 유대의 집의 구조는 우리처럼 깨끗한 바닥이 아니고 거기에 짚으로 얼기설기 놓여있고 또 잎사귀를 가지고 놓았기 때문에 그것을 찾으려면 온 집을 들어내야 합니다. 그런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은전을 찾는다는 이야기입니다.
또 마지막 잃은 아들 이야기 우리가 탕자의 비유로 익히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유산을 상속받아 집을 떠난 둘째 아들은 허랑방탕한 생활을 하는데 아버지는 그 아들을 기다립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동구 밖에 나와서 이제나 저제나 아들이 돌아올까 기다리는 그 아버지의 마음이 바로 하나님의 심정임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 가지 이야기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물건을 잃어버렸든 양을 잃어버렸든 아들을 잃어버렸든 그 상실의 슬픔이 다 있습니다. 여러분도 잃어버린 경험이 있으시죠? 가끔 주일날 예배 끝나고 나면 핸드폰을 두고 가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돈지갑두고 가시는 분은 못봤습니다. 핸드폰은 가끔 두고 가십니다. 우리들도 핸드폰 잃어버리면 답답합니다. 찾기까지 참 불편합니다. 잃어버린 것 찾는 마음이 그런 겁니다.
두 번째의 공통점은 애타게 찾는다는 것입니다. 아주 열심히 찾습니다. 4절입니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그 잃어버린 양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않겠느냐 찾는다는 말이 두 번나옵니다. 이게 뭡니까. 찾을 때까지. 포기란 있을 수 없습니다. 시한도 없습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을 때까지 찾는 것입니다. 찾아서는 너무 기뻐서 어깨에 메고 돌아와서 동네 사람들을 부른다는 이야기입니다. 애타게 찾는 점은 똑같습니다. 여인도 애타게 은전하나를 포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버지도 사랑하는 아들을 포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새벽부터 나와서 밤늦게까지 그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심정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심정이다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이 이야기의 공통점은 다시 찾음으로써 기쁨이 회복된다는 것입니다. 5절 6절입니다.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너무너무 즐거워서 어깨에 메고 와서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기쁜 소식은 누군가에게 알리고 싶습니다.
햄버거집에서 후렌체프라이드-주인을 몰라보고, 주인의 주권을 인정치 않고, 주인의 맘을 모른다.
오늘 이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잃은 양을 찾으니까 너무 좋아서 동네사람들 다 모아서 잔치를 벌였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손익 계산을 하지 않습니다. 양 한 마리 찾은 게 대단합니까? 그런데 양 한 마리가 더 드는 잔치를 벌였습니다. 그건 뭐냐? 양을 물질로 보는 게 아닙니다. 양을 생명으로 보는 겁니다. 양을 자기 가족으로 보기 때문에 그는 그 찾은 양을 즐거워하는 겁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천재는 노력하는 사람을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 노력하는 사람은 늘 자기가 수고하고 애쓴다는 생각이 있지만, 즐기는 사람은 수고와 애씀 자체가 즐거움이 됩니다. 사람이 나쁜 것을 즐기면 폐인이 되지만, 하나님이 즐기라고 하신 것만 즐긴다면 영웅이 됩니다. 여러분은 삶에서 무엇을 즐기십니까? 하나님은 사람에게 즐길 수 있는 심성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만약 죄를 즐긴다면 즐김 후에는 공허와 허탈감이 찾아오겠지만, 신앙을 즐긴다면 즐김 후에 평강과 감사와 안정과 풍성함이 지배할 것입니다.
솔로몬이 즐긴 것은?
솔로몬은 인생 말년에 인생이 하나님이 주신 것을 누리는 삶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12절과 13절에서 말합니다. "사람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을 또한 알았도다."
솔로몬은 이 땅에서 전무후무하다고 할 복을 누렸습니다. 솔로몬의 모든 부가 세상의 어떤 왕이 누리는 것보다 더 부유하고, 솔로몬의 지혜 그랬습니다.
뿐만 아니라, 솔로몬과 왕궁을 호위하는 군대도 막강했습니다. 아무도 그를 넘보지 못할 만큼 강력했습니다. 또한 그런 솔로몬의 부와 지혜와 명성을 보러 오는 각 나라 사절단들도 예물을 금이나 값진 보물로 가져왔습니다. 그 모든 것들은 다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그후 바로의 딸과 결혼하여 이방 신들을 왕궁에 들여놓았으며 많은 이방여인을 사랑해서 많은 궁녀를 두었습니다. 후비가 700명이었고, 첩이 300명이나 되었습니다. 솔로몬이 나이가 늙어갈 때 그 이방여인들이 솔로몬의 마음을 빼앗아서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게 만들어 솔로몬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주신 선물들을 욕되게 누리고 말았습니다. 누리기는 누렸는데 죄악을 행하는 데 누리고 말았습니다. 그로 인해서 솔로몬은 졸지에 부와 지혜와 명성을 다 잃어버려 비참한 노후를 살았습니다.
여러분, 즐기는 삶이란 하나님의 선물이며 좋은 것인데, 그러나 우리는 어떤 즐김이 가치 있는 즐김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솔로몬처럼 부와 명예 자체만 즐기다가는 폐가망신 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무엇을 즐길 것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돌아온 아들을 본 아버지의 마음이 어떻습니까. 즐거워하시는 겁니다. 15장 24절입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아끼는 것 없습니다. 제일 좋은 옷을 갖다 입힙니다. 신발을 새로 신깁니다. 가락지를 끼웁니다. 그리고 살찐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였습니다. 이게 하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이것은 물질적으로다 물질의 가치를 가지고 판단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왜? 그것은 영혼의 문제이고 생명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첫째, 참된 용서는 제한이 없습니다.
둘째, 참된 용서는 조건을 붙이지 않습니다.
참된 용서는 고통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양은 어수룩하고 바보스럽습니다. 어릴 때보면 부부사이도 더우면 좀 떨어져 자자 덥다 그러는데 양은 여름에도 다 붙어 잡니다. 겨울이면 붙어야 되는데 다 떨어집니다. 이런 바보들이 어디 있습니까. 양이 이렇습니다. 거기다가 시력이 안 좋아서 멀리를 못 봅니다. 그래서 풀 뜯다가 낭떠러지인줄도 모르고 풀 뜯다가 죽는 양들이 수도 없이 많다는 것입니다. 앞에 양이 떨어지면 같이 떨어집니다. 이게 양입니다. 그래서 목자의 도움과 인도가 꼭 필요한 게 양입니다.
이사야 53장을 보십시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각기 제길로 갔거늘, 어리석은 인간들이 양과같은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양은 더 나아가서 길눈이 어두워서 돌아오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문제입니다. 왜 기억력이 없느냐. 아니면 길치라서 그러는가 아니면 침해인가. 별생각을 다해봅니다. 언젠가 목회자 모임을 갔더니 어떤 목사님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합니다. 어떤 할머니가 시골에서 올라와서 택시를 탔습니다. 택시기사가 차를 몰고 한참을 가다가 할머니가 택시기사에게 묻더라는 것입니다. 여보게 기사양반 내가 아들집에 가자고 했나 딸네 집에 가자고 했나. 택시기사가 뒤를 돌아보면서 그러더랍니다. 아니 할머니 언제타셨어요. 그러더랍니다. 둘 다 마찬가지입니다. 양은 도무지 자기 집을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서 데리고 와야 합니다. 잃은 양은 절대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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